틀이 있는 자와 틀이 없는 자
유학자가 유학을 하고, 의사가 의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에도시대 일본에서 오규 소라이는 유학의 영역에서 주자학을 해체했고, 요시마스 토도라는 의사는 의학의 영역에서 음양오행을 걷어냈다. 둘은 거의 같은 시대에, 같은 지적 풍토에서, 같은 방향의 작업을 했다. 주자학이라는 거대한 통합 세계관이 균열을 일으켰을 때, 유학자는 유학 안에서, 의사는 의학 안에서 각자 그 균열에 대응한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전환을 ‘자연에서 작위로’라고 불렀다. 주자학에서 세상의 질서는 천리(天理)가 스스로 드러난 자연적인 것이다. 소라이는 이를 부정했다. 제도란 선왕이 만든 것이지,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다. 토도도 같은 방향으로 갔다. 음양오행이라는 이론적 틀을 걷어내고, 환자의 배를 직접 만져서 진단하는 복진(腹診)이라는 경험적 방법을 세웠다.
둘 다 형이상학적 자연 원리에서 경험적 실증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전문 영역 안에서 그 작업을 완결했다. 소라이는 유학을 정치의 학문으로 전문화했고, 토도는 의학을 실증의 학문으로 전문화했다. 근대적 전문 분화의 정상적 경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이것과 다른 방식으로 같은 전환을 수행한 인물이 있다.
이제마는 격치고(格致藁)라는 유학 저작을 쓰고,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라는 의학 저작을 썼다. 그에게 이 둘은 별개의 학문이 아니었다. 맹자의 사단(四端) — 인간의 타고난 성정(性情) — 을 의학적 체질론의 기초 원리로 삼았다. 유학적 인간론이 곧 의학적 진단과 처방의 근거가 되는 구조이다.
소라이와 토도가 정상적이라면, 이제마 쪽이 특이하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소라이학이라는 방법론적 틀의 존재 여부에 닿게 된다.
토도는 소라이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충실하게 수용했다. “후세의 주석을 걷어내고 원전의 원래 언어로 돌아가라"는 원칙이다. 토도는 이것을 의학에 엄격하게 적용했다. 상한론에서 음(陰)·양(陽)·허(虛)·실(實) 같은 글자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후세의 관념론적 개입이라고 본 것이다. 장중경의 원문과 자신의 임상 경험, 이 두 가지만 인정하는 태도였다.
이 엄격함은 강력한 실증주의를 낳았다. 동시에 의학을 원전 텍스트와 신체 경험이라는 범위 안에 한정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유학적 인간론이 의학 안으로 들어올 여지가 이 틀 안에서는 제한된다.
이제마에게는 그런 틀이 없다. 성리학의 개념도 쓰고, 맹자도 쓰고, 장중경도 참조하되, 어느 하나에 종속되지 않는다. “원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고적 원칙 자체가 없다. 자기 사유에 필요한 것을 자유롭게 가져다 쓴다. 격치고에서 성리학 용어를 쓰면서도 주자학적 이기론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이 그 증거이다.
틀이 있으면 그 안에서 날카로워지지만 틀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 틀이 없으면 확산될 위험이 있지만 영역을 넘어설 수 있다.
소라이학적 원전 회귀의 논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유학 쪽에서 더 극적으로 드러났다. 소라이가 “공맹의 원전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국학파의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공맹 자체가 외래 사상이니, 일본 고유의 원전인 고사기(古事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 오래된 것이 더 진짜"라는 논리를 끝까지 밀면, 결국 신화로 회귀한다. 국학파가 실제로 신도(神道)라는 신화적 영역으로 간 것은, 원전 회귀라는 방법론 자체에 내장된 구조적 위험이 현실화된 사례이다.
토도의 의학은 같은 원전 회귀의 논리를 따랐지만, 의학에는 “환자가 낫는가"라는 경험적 검증이 있으므로 신화로 빠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학을 좁은 범위 안에 한정한 것은 같은 엄격함의 결과이다.
이제마는 이 구도 바깥에 있었다. 원전 회귀의 논리에 매이지 않았으므로, 신화로 빠질 위험도, 좁은 범위에 갇힐 위험도 없었다. 자유로움이 유학과 의학 사이를 넘어갈 수 있게 한 조건이었다.
같은 전환이었다. 다만 변형의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